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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종교와 진리 | 승인 2016.06.23 22:35
서창원 교수 (총신대학교, 개혁주의설교연구원 원장)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1∼20)

블레셋 왕 아기스의 염원과 다윗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전쟁에 나가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 다윗은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가솔들이 머물고 있는 시글락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정은 3일이나 소요되었다. 그러나 마을에 도착한 그들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지내리라고 생각되었던 온 가족들이 온데간데없는 것이었다. 식구들과 잠자며 지냈던 곳은 다 불타버렸고 온 마을이 다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아말렉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군사들의 가솔들이 머물러 있는 시글락에 쳐들어 왔을 때 어쩌면 그들도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을 하려고 왔는데 전쟁할 남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다 연약한 여자들과 아이들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피한방울 흘림도 없이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여인들은 다 사로잡아 끌고 갔다. 그 가운데는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본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심한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다 잡혀갔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잃게 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다. 가족들을 잃은 비극을 경험한 사람들의 오열과 분노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대형사고들을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충분히 목격할 수 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타난 그 슬픔도 극에 달하였다. 그 불똥이 엉뚱하게 다윗에게 튀었다. 다윗을 돌로 쳐 죽여 극도의 슬픔을 달래려는 분풀이로 덤벼든 것이다. 아마도 다윗은 무척이나 당황하였을 것이다. 아니 충격이상이었을 것이다. 자기도 피해자인데 그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로 돌려서 돌로 쳐 죽이자고 덤비니 그 심정이야말로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그래서 성경은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다”고 했다.

사실 이들은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사흘 길을 걸어 돌아왔기 때문에(최소한 150km이상의 거리) 육신적으로 몹시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다.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집에 가서 푹 쉬게 될 것을 기대한 그들은 모든 것이 처참하게 무너졌음을 목격하니 눈알이 뒤집혔을 것이다. 더욱이 가족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그들의 황당한 심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모든 책임을 다윗에게 묻고자 덤빈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윗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까지 함께 동거동락하던 자들이다. 비록 식구들이 다 잡혀간 사실 때문에 망연자실한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다윗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충실한 부하들이었던 그들이 돌변하여 다윗을 돌로 쳐 죽이겠다고 덤빈 것은 정말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순간 그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군급하다’는 말은 어려운 고비에 막혀 사정이 몹시 급한 상태를 말하는데 엄청난 좌절이나 낙담을 뜻하는 말이다. 다윗이 식구들을 보호할 최소한의 군사들을 주둔시켜놓고 가야할 터인데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군사로 쓸 사람들은 모조리 다 데리고 간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상치도 않은 이 사태가 벌어졌으니 지도자로서 다윗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리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만큼 당장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하겠는가? 분노가 충천한 군중들 앞에서 다윗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윗은 그 긴박한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힘입었다. 그리하여 그 위기를 벗어나 결국은 가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되찾는 복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이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들의 소리나 욕심을 앞세우는 것을 피하라.

사실 이 사건의 전말은 근원적으로 따지고 올라가면 사울이 죽이지 않고 남겨둔 아말렉 사람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울의 손에서 목숨을 건진 아말렉 사람들은 자기들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글락을 침범한 것이었다. 그 결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큰 곤경에 처하게 된 사실이다. 만일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였더라면 지금의 환난을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신앙여정을 걸어갈 때 목사가 혹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 여파가 당장 모든 공동체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한 피해는 반드시 오게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즉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지금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혹은 사울처럼 욕심을 채우려고(삼상 15:9) 다 진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쏟으라고 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보다 불순종의 길을 갈 때(삼상 15:19), 또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할 때 그로 인한 하나님의 손대심은 막중한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물론 정황상 우리가 처한 형편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말씀에 반하는 길을 갈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이다. 순간의 위기를 일단 모면코자 선택하였던 것을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하게 되고 버림을 당할까 염려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욕구가 어떠하든, 또 처해 있는 상황이 매우 불리한 것이라 할지라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 모면으로 얻은 이익보다 불순종으로 인한 아픔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울은 아말렉을 죽이라는 명령보다 자신의 욕심과 사람들의 의중을 더 중히 여긴 것 때문에 당장은 큰 문제가 없이 승리를 얻었어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잃는 처지가 되었다. 그것도 요나단을 포함한 사울의 아들들도 다 죽임을 당케 되었다(삼상 31:2).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항상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남편의 잘못 때문에 아내와 가족들이 고통을 겪고 목사의 불순종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아픔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순종으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리는 길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있다. 다윗이 직접 불순종 한 것도 아닌데 왜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이런 화가 임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다윗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사울의 전철을 밟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비록 고통의 파장은 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인지 다윗은 온 몸으로 경험하였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더욱 견고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흘리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얻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 군대들과 함께 동족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심으로서 아말렉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식구들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주 관심은 다윗과 그의 식구들이다. 블레셋 진영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가지신 선한 뜻은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금만 더 지체되었을지라도 식구들이 군인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모를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 아말렉 사람들이 그들을 모조리 다 죽였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살려서 데리고 갔다는 것은 그들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기 백성을 돌볼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도록 촉구하신 것이다. 지금 블레셋과 손잡고 동족을 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돌볼 책임을 주지시키신 것이다. 만일 이 때 이스라엘을 치는 블레셋 왕 아기스와 전쟁에 나갔더라면 훗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이 사건이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심으로서 훗날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는 일에 누구도 방해하지 않게 하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다윗이 블레셋 왕을 도와 이스라엘을 치고자 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같은 식구들끼리 싸우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일에 여호와께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을 옳지 않게 여기신 하나님은 다윗을 막았다. 다윗은 블레셋 아기스를 돕지 못하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패잔병도 그렇다고 승전의 용사들로도 아닌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그들의 눈에 비친 광경은 처참한 것이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의 집 식구들이 다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말렉을 사용하시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치신 것은 파괴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다. 다윗의 인생은 다윗이 택하였다.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간 것은 다윗이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다 하나님의 손안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동족을 멸하고자 하는 선택을 했을 때 하나님은 블레셋 장수들의 입을 사용하여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으셨다.

동족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물론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심지어 악인의 죽는 것 까지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사단은 언제나 멸망케 하고자 덤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삼키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덤빈다. 악한 마귀는 인정사정도 없다. 그래서 무자비한 자나 무정한 자들도 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성경은 단호하게 가르쳐 준다. 그에 비해 하나님은 언제나 살리는 일을 하신다. 그의 공의로운 심판은 파멸이 목적이 아니라 돌이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고자 함이다. 그의 채찍은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하려함이다. 아말렉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식구들을 잡아간 것은 그들을 다 노예로 부리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다윗과 그의 가솔들을 다 살리고 더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할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요 죽이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마귀를 살인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일은 우리를 살리사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혹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몽둥이의 역할을 하게 될 때 반드시 기억할 것은 죽이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바르게 함이 그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종종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몽둥이를 휘둘려 수많은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우를 범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게는 악을 저지르게 된다. 이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칭찬들을 수 없는 일이다. 설혹 그것이 악한 죄인을 벌하는 공의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잘했다고 말씀하실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를 살려 더욱 주님께 붙어살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신앙여정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다윗이 절박한 환경가운데서 용기를 가진 것은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군박한 상황을 벗어나 다시 군사들을 정돈하고 끌려간 가족들을 구출하는 작업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여정을 주관하시고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데서 출발한 것이지 않으면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임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황당한 시험거리가 다가올 때 절망하지 말라.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만일 다윗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아기스 왕과 함께 전쟁에 나가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다윗의 자만심이었을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사울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주하는 그와 그의 일행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앞으로도 항상 지키시고 돌보실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쟁하러 나가는 일에 그것도 자기 동족을 치러 나가는 일에 기도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글락 사건을 통하여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은 여호와께 기도하고 나아갔다(8절).

사실 여기서도 얼핏 생각하면 기도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 자기 식구들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당장 뒤쫓아 가서 구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하나님께 물을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기도할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좇아가서 아말렉을 물리치고 가족들을 구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접하면서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잘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수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환난을 당할 때 절로 기도의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지 확연하게 들어나는 것은 기도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남은 있어도 기도하며 교제하는 일은 거의 사라지다 시피 되었다.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다할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늘 기도의 자리에 머문다. 대다수가 분주하게 지내고 이러저러한 일들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들을 찾는다. 아합 왕 시대에도 대다수의 선지자들이 다 그릇된 길로 갔지만 바알에게 절하거나 입 맞추지 아니한 사람들이 7천명이나 남아 있었던 것이다(왕상 19:18).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믿음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기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기도한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보이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기도가 멈추면 망하는 징조이다. 함께 모여 기도하자는 것에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 칭찬들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정말 막막한 상황에 떨어질 때가 찾아온다. 그것은 믿음의 진검승부를 하는 연단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내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찾거나 사람을 의지하는 자들이 있다. 사울 왕을 보라. 동일하게 군박한 사건을 경험하였다(삼상 29:15).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그는 결국 망하는 길로 나아갔다. 물론 하나님이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하지 아니한 것은 그가 오로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가지고 그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위기를 더 악화시킨다. 문제를 해결해도 그 파장과 손실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로 나아간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8절). 하나님의 그 약속하신대로 다윗은 “그들이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19-20절).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 위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다윗에게 찾아온 위기, 설혹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찾아온 것이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전능자이다. 그 하나님께 피함이 방백들을 의지함보다 나으며 그 하나님을 의지함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 같아도 그 파장은 공동체에 미치는 것이다. 각각의 성도는 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온 몸이 아프다. 그러나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온 몸이 다 영광을 누린다. 성도 개인의 죄는 당사자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돌아보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죄의 불씨를 남겨두면 반드시 화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모든 뿌리를 죽여야 한다.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날마다 죽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항상 기도에 힘쓰는 자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서도 솟아나는 길을 발견한다. 하나님만이 능히 도우실 수 있다.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신 하나님을 날마다 송축하며 그의 영광을 맛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잃은 것을 다 되찾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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