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개혁신앙
조선교회! 우상 앞에 무릎 꿇다!
종교와 진리 | 승인 2016.05.14 23:21

교회 회복운동인 재건운동과 이에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재건교회는 조선 개신교 초기 형성된 ‘조선예수교장로회’와 상관없는 교단이거나 이권을 위해서 역사와 무관하게 뜬금없이 형성된 교단이 아니다. 우상숭배로 범죄 한 한국교회 대부분의 개신인들과 달리 투옥과 순교를 무릎 쓰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총회 전체 교회에 회개를 촉구한 교회 회복운동이었다. 그러나 총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돌이키지 않아 교회 회복운동은 재건운동으로 그리고 재건교회로 개혁적인 횡보를 걷게 되었다.

이런 사실이 한국 개신교 역사 속에서 도리어 호도되고 있고, 우리는 힘에 논리로 쓰여진 역사를 접할 때면 가슴 먹먹함을 느낀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마저 이런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뼈아픈 사건이 한국교회에 어떤 경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885년 4월 5일 공식 목사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입국한지 22년이 지난 1907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선교사 중심의 공의회에서 조선인이 직접 치리할 수 있는 기관인 독노회를 조직하었다.

이와는 달리 조선의 정치는 점점 약해져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 되면서 조선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경찰권과 사법권을 빼앗겼다. 1907년은 미국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가즈라-테프트 밀약을 근거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걸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국에 의해 비밀리에 체결된 국제적 불법 행위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정치적 횡포 가운데도 조선교회는 1907년 대 부흥을 맛보게 된다. 결국 1912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로 승격되고 산하 7개 노회를 거느리는 완전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여 사실상 조선인으로서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개신교는 복음적 희망을 주었고 교육과 문화에 있어 사회 소외계층, 서민, 천민, 아이들, 여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케 하여 실제적 도움을 주었다. 특히 기독교 애국지사 가운데 안창호, 이승훈, 양전백 등이 이 일에 선봉장이었다. 일제는 이런 인물들이 늘 눈에 가시였고 기회가 주어지면 제거하고자 하였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은 개신교와 관계가 없으면서도 일본은 이를 빌미로 ‘해서교육총회’와 ‘신민회’를 타도하는 명분으로 삼고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애국지사 뿐 아니라 교회를 탄압하였다. 당시 기소자 123명 중 92명이 기독교 교인이란 사실만으로 가름해 볼 수 있다.

1911년 8월 23일 총독부는 ‘교육 칙령’을 발표하여 조선인들을 일제에 충성하는 백성으로 교육하고자 하여, 1925년까지 학교는 일제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인준을 받도록 요구했다. 특히 성경과목과 한국 역사 과목을 교과 과정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으나 장로교 학교들은 성경과목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제에 선교사들과 뜻을 합쳐 일제에 통고하였다.

이런 압력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자주적으로 1919년 3월1일 주권 회복운동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에도 수많은 기독교들이 포함 되었다. 특별히 3·1 운동의 33인 대표 가운데 절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일로 일제는 교회를 더욱더 핍박하였다. 당시 장로교회 총회는 피해 조사 보고를 노회와 지교회로부터 보고 받았는데 체포된 인원이 3,804명에 이를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일제에게 있어 개신교는 적대적이었을 뿐 아니라 천황중심의 민족주의와도 충돌되었기에 좌시만 할 수 없는 종교단체였다.

일제는 전력을 증강하여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 일로 많은 일본 군인들이 전사했다. 이에 일제는 전몰장병과 일본 천황을 참배하는 의식에 학생들을 동원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총독부는 위의 두가지 의식을 주기적으로 할 것을 각 학교에 시달하였다. 장로교 총회는 이를 즉각적으로 건의하기로 결의한 후 총독부에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35년 11월 평남 도지사는 도내 교장단 회의를 개최하기 전 모든 교장들dprpr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때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장 윤산온과 숭실여자학교 교장 스누크 여사가 이를 거부함으로서 문제는 확산되었다. 도지사는 60일간의 시간을 주면서 신사참배를 하든지 아니면 교장직을 사임하고 학교의 문을 닫으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미북장로교는 1935년 12월 13일 신사참배 반대 결의하고 반대한 교장들은 학교 문을 닫고 귀국하였다. 결국 1936년 10월 전국의 기독교 학교에 일제는 무장 경관들을 투입시켜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 일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위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전적으로 ‘국가의식’이라는 감언이설을 만들어 냈다. 이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면 신사참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일본에 충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결국 이를 묵살하였다. 이런 작업을 통해 일제는 ‘내선일체’, ‘민족정신 총동원’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보고 문화정책을 끝내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병행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와 천황숭배는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드는데 필요조건이었으며, 이를 통해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였다. 내한한 선교사들과 조선장로교는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범들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공감하였다.

1931년부터 기독교 학교를 중심으로 종교적 충돌이 발생한 신사참배, 그리고 이 일이 신앙의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한 선교사들은 학교 문을 닫더라도 이행할 수 없음을 결정하면서 총회도 힘을 실었었다. 1931년 여름에는 주기철목사 주도 하에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결의를 한 후 그해 9월 제 34회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반대 안을 제출하였다.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그 뜻을 함께한 목사와 성도들은 차후에 있을 일제의 조선 교계에 대한 강력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선각자적 안목과 단호한 입장 표명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38년 6월 해운대교회에서 열린 제 41회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8년 2월 9일에 가서는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총회에 신사참배를 헌의하였고, 4월에는 제주노회와 순천노회가 5월에는 전남노회가 정기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그 뒤로 9월 이전까지 27개 노회 즉, 만주 4개, 조선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이와 같이 신사참배 결정 안들이 총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여러 노회에서 가결되어 총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경남노회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1938년 9월 10일 제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안에 상정되고 결의가 되므로 일제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당시 27회 총회 결의 때 회의장 분위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회 개회 익일(9월 10일),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평서・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응율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 동의안이 상정되었고, 박익현과 길인섭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는 전신을 벌벌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 라고 대답하십시오” 라고 물었다. 이 때에 제안자와 동의 제청자 등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으며, 그들 외에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수 백 명의 경관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일대 위협을 표시하자, 당황한 총회장은 부는 묻지도 않고 그대로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했다. 그러한 사태를 예측했던 선교사들은 방위량 선교사를 선두로 몇 명이 회장의 불법 선포에 항의하는 한편, 신사 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경찰관의 강력한 제지로 발언이 막히자, 선교사들 30명이 차례로 기립하여 “불법이요!” “항의 합니다!”라고 외쳤고, 헌트선교사는 무술경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외치다가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이런 소란 속에 총회 서기 곽진근은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려 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를 기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 택 기

 

이와 같이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명실상부한 불법 회의를 강행 했다. 27회 총회 이후 일제는 적극적으로 돕는 단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고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을 다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때 회장으로 일본제국의 단바세이가 선출되었다. 이에 일제는 종교법상 힘을 얻어 1939년 3월 제 74회 일본제국 의회에서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켜 명실상부 조선교회를 일제의 법아래 두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1938년 제 27회 총회는 타의에서든 자의에서든, 합법이든 불법이든 신사참배를 가결하여 억지로 통과 시킨 장로회 전체의 상위조직의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으며, 일제는 이를 계기로 공식적 탄압의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국가의식이고, 개인의 신앙문제라고 해도 이는 분명한 우상숭배요, 배도 행위였다.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나 배도 행위가 아니였다면 한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인정받았던 한경직 목사나 박윤선 박사 같은 분이 신사참배를 한 것으로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부산수영해수욕장에서는 한상동, 김차숙, 한정교, 이정자, 윤술용, 이인재, 김현숙, 조수옥, 이정자, 백영옥, 배학수 등이 기도회를 갖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전개에 대한 주장과 실행사항을 만들었다.

 

1. 신사 참배하는 교회는 출석하지 말 것

2. 신사 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말 것

3. 신사 참배한 교회에 십일조나 연보를 하지 말 것

4. 교회출석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주로 할 것

 

이것이 교회 재건운동의 약속이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평양신학교가 신앙의 양심과 기독교 교리와 신조에 위배되었음을 받아들여 1939년 9월 30일 폐교를 단행했다.

결론

일제강점기 핍박 당시 교회는 신사참배가 분명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로마가톨릭이 신사참배를 문화적인 의식으로 간주하여 그 나라의 문화에 적응하고 조화하려는 융화 정책으로 인정하여 수용하였다. 개신교 전체도 투옥과 죽음 앞에서 가톨릭의 전철을 밟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일이 성경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지 교황이 누구냐에 따라 그 결정이 바뀐다는 것은 옳지 않다.

개신교는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교황의 말이 아닌 오직 성경으로 개혁하길 원했다. 따라서 성경 안에서 찾은 답은 그 어떤 사람도 바꿀 수 없기에 로마가톨릭 안에서 개혁자들은 순교를 각오한 투쟁을 하였다. 그래서 지금의 개신교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제 당시 개신교는 어떠했는가? 선교사들은 반대하였고, 총회도 총독부에 항의 서안을 보냈고 평양 신학교마저 문을 닫은 이 때 회의를 통해 앞서 항거한 모든 것을 뒤집어 결정했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모든 행위와 믿음의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총회의 권위가 성경 위에 놓였다는 점에서 로마가톨릭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김대영 교수

한국성서대학교 (신학부, B.A)
한국성서대학교 일반대학원(역사신학, M.A)
한국성서대학교 신학대학원(목회신학, M.Div)
안양대학교 일반대학원(교회사, Ph.D 수료)

 

종교와 진리  webmaster@churchheresy.com

<저작권자 © 종교와 진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종교와 진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제보상담광고문의회원전용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영등포구 도신로 244 2층  |  대표전화 : 02)6225-7001~3  |  팩스 : 02)6225-7009  |  청소년보호책임자 : 오명옥
사업자등록번호 : 108-92-16892  |  잡지사업등록번호 : 영등포, 라00387  |  신고증 : 제2013-서울관악-0299호  |  대표 : 오명옥
Copyright © 2020 종교와 진리.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